
SF 영화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번에도 AI가 적으로 나오겠지." 터미네이터부터 매트릭스까지, 인공지능은 언제나 인류를 위협하는 존재로 그려졌으니까요. 저도 그런 기대를 갖고 영화 크리에이터를 봤습니다. 그런데 극장을 나오면서 뭔가 다른 감정이 남아 있었습니다. 단순히 "재밌었다"가 아니라, 조금 불편하고 묵직한 무언가였습니다.
AI 전쟁이라는 설정, 그런데 누가 악당인가
크리에이터의 세계관은 생각보다 촘촘합니다. 수십 년 전 인공지능 기술이 폭발적으로 발전하면서, AI는 단순한 도구를 넘어 독립적 사고를 가진 존재로 인류와 공존하게 됩니다. 그러다 어느 날 핵폭발 사고가 터지고 무려 100만 명이 목숨을 잃습니다. 서구 세계는 AI와 핵무기 사용을 금지하지만, 뉴아시아는 그 규범을 따르지 않습니다. 여기서 냉전 구도(Cold War Structure)가 형성됩니다. 냉전 구도란 군사적 충돌 없이 이념과 체제를 두고 두 세력이 대립하는 상태를 말하는데, 이 영화에서는 인간 대 인간이 아니라 인간 대 AI가 그 구도를 채웁니다.
저는 처음에 당연히 인간 편에서 영화를 봤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 경계가 흐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서구 세력이 내보내는 노매드(NOMAD)라는 무기가 등장하는데, 이건 단순한 전투 함정이 아닙니다. 1조 달러를 들여 10년간 제작된 초대형 우주 전투 플랫폼으로, 지상의 어떤 아지트든 정밀 폭격으로 지워버리는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폭격이 전투원만 겨냥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누가 진짜 위협적인 존재인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크리에이터가 그리는 AI 전쟁은 기존의 SF 문법을 비틀어 놓습니다. AI를 인류의 위협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영화 안에서 실제로 무고한 존재를 대량으로 제거하는 건 오히려 인간 측입니다. 저는 이 구조가 상당히 의도적이라고 봅니다.
시뮬런트, 경계를 무너뜨리는 존재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개념이 바로 시뮬런트(Simulant)입니다. 시뮬런트란 인간의 외형을 그대로 구현한 AI 존재로, 생물학적 성장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처음 제작될 때의 외형을 그대로 유지합니다. 그래서 어린 시뮬런트는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게 극 중 인물들의 상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어린아이 형태의 시뮬런트 알피가 등장합니다. 처음 봤을 때 저도 당황했습니다. 아이의 몸을 가진 존재가 AI라는 게 직관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거든요.
알피는 감정을 표현하고, 그림을 그리고, 심지어 위험에 처한 다른 존재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행동을 합니다. 이 장면이 제 경험상 이 영화에서 가장 감정적으로 흔들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철학에서는 이런 상황을 인격성(Personhood)의 문제로 다루기도 합니다. 인격성이란 단순히 생물학적 생명 여부와 관계없이, 스스로 판단하고 감정을 갖고 타인과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키는 개념입니다. 알피를 보면서 저는 "이 아이를 기계라고 부를 수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꽤 오래 멈칫했습니다.
실제로 AI의 도덕적 지위에 관한 논의는 학계에서도 이미 본격적으로 진행 중입니다. 철학자 닉 보스트롬을 포함한 연구자들이 AI의 의식과 권리 가능성을 진지하게 탐구하고 있으며(출처: 옥스퍼드 인류미래연구소), 이 문제는 더 이상 SF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닙니다. 크리에이터는 그 논쟁을 영화적 방식으로 우리 앞에 던집니다.
이 지점에서 제가 보기에 영화의 장점과 단점이 동시에 드러납니다. 알피라는 캐릭터를 통해 감정적 몰입을 끌어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AI와 인간 사이의 갈등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확대되어 이 전쟁에 이르렀는지에 대한 서사적 설명은 다소 얕게 처리된 느낌이 있습니다.
인간성이라는 질문, 조슈아라는 인물을 통해
주인공 조슈아는 처음부터 공감 가는 인물은 아닙니다. 군인 시절 누구보다 AI를 멸시했던 인물이었고, 그의 움직임은 처음에 전적으로 임무와 개인적 집착에 의해 결정됩니다. 사라진 연인 마야를 찾겠다는 것이 그의 유일한 동력이었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되면서 그는 점점 달라집니다.
저는 조슈아의 변화가 이 영화에서 가장 현실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 신념을 바꿉니다. 처음에는 임무를 위해 움직이던 인물이 AI 존재들과 시간을 보내고, 그들이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걸 반복적으로 확인하면서 서서히 입장을 바꿔갑니다. 이 과정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대사로 설명하는 게 아니라 장면과 행동을 통해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크리에이터가 다루는 핵심 질문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감정을 표현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존재를 기계라고 부를 수 있는가
- 전쟁에서 '아군'과 '적'의 구분은 항상 정당한가
- 인간다움의 기준은 생물학적 구조인가, 아니면 행동과 선택인가
이런 질문들은 사실 크리에이터만의 주제가 아닙니다. 현재 AI 윤리 분야에서도 비슷한 논의가 진행 중이며, AI의 행동 기준과 책임 소재를 다루는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출처: AI Now Institute). 영화는 이 논의를 학술 언어가 아니라 전쟁이라는 극단적 상황 속에서 풀어낸 셈입니다.
솔직히 이 영화가 아쉬운 것도 있습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정치적 갈등 구조보다 감정적 해소에 집중하면서, 전쟁의 복잡한 맥락이 다소 단순해지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조금 더 냉정하게 구조를 유지했다면 완성도 면에서 한 단계 더 올라갔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AI에 대해 평소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게 된 건 사실입니다. 그게 이 작품이 남긴 가장 큰 성과라고 봅니다.
크리에이터는 완벽한 영화가 아닙니다. 하지만 "AI란 무엇인가",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진지하게 던지는 몇 안 되는 SF 영화 중 하나입니다. 지금 이 시점, AI가 일상 속으로 빠르게 들어오고 있는 현실에서 이 영화를 보는 것은 생각보다 의미 있는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SF 영화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단순한 오락 이상의 무언가를 찾는 분이라면 한 번쯤 시간을 내볼 만한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