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른이 되면 기도가 이루어진다고 믿는 게 왜 이렇게 어려워질까요? 2015년 개봉한 영화 리틀 보이를 보면서 저는 그 질문을 정면으로 마주했습니다. 1940년대 태평양 전쟁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단순한 전쟁 영화가 아니라, 아이의 순수한 믿음이 주변 사람들까지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아이의 믿음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전쟁 영화라고 하면 보통 전선, 총성, 영웅적인 군인을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주인공은 키도 작고, 싸움도 못하고, 아직 아빠 없이는 세상이 무서운 여덟 살짜리 소년 페퍼입니다. 저는 솔직히 처음에는 '이게 무슨 전쟁 영화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보다 보니 그게 바로 감독 Alejandro Gómez Monteverde가 의도한 지점이었다는 걸 깨달았죠.
페퍼는 아빠 제임스를 전쟁터에서 되돌아오게 하기 위해 신부님이 건넨 '착한 일 목록'을 실천하기 시작합니다. 이 목록은 일종의 미션 리스트처럼 보이지만, 사실 영화 안에서는 내러티브 구조(narrative structure)의 핵심 골격으로 기능합니다. 여기서 내러티브 구조란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 즉 인물이 어떤 사건을 통해 변화하고 성장하는지를 보여주는 틀을 의미합니다. 페퍼가 목록을 하나씩 채워가는 과정 자체가 곧 그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되는 셈이죠.
어릴 때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어딘가에 빌면 이루어질 것 같은 그 감각. 페퍼가 아빠를 위해 용돈을 모아 부츠를 사는 장면에서 그 감각이 갑자기 되살아났고, 예상치 못하게 눈물이 차올랐습니다. 그 작은 손에 쥔 부츠 하나에 담긴 마음의 크기가, 오히려 어른인 제가 살면서 잃어버린 무언가를 건드리는 것 같았거든요.
편견 극복, 현실에서도 가능한 이야기일까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은 장면은 사실 전쟁 장면이 아닙니다. 일본계 미국인 하시모토를 향한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바뀌어가는 과정이 훨씬 더 강하게 남았습니다. 제가 직접 경험해 본 결과, 사람이 타인을 향해 쌓은 적대감이란 게 하루아침에 생긴 게 아니기 때문에, 그게 풀리는 과정도 절대 단순하지 않더라고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에서 일본계 미국인들이 겪은 처우는 역사적으로 기록된 사실입니다. 당시 미국 정부는 일본계 미국인 약 12만 명을 강제 수용소에 격리했는데, 이는 인종 프로파일링(racial profiling)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힙니다. 인종 프로파일링이란 개인의 실제 행동이 아니라 인종, 민족, 국적 등의 집단적 특성만으로 특정인을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하는 편향적 판단 방식입니다. 당시 미국 대법원이 이 수용 조치를 합헌으로 판결했다는 사실은 지금 돌아보면 충격적이기까지 합니다(출처: 미국 국립공문서기록관리청).
영화 속 하시모토는 그 역사적 맥락 안에서 놓인 인물입니다. 처음에 페퍼도 그를 무조건적으로 미워했는데, 그 감정이 사실은 스스로 생각해서 만든 게 아니라 주변 분위기에 휩쓸린 결과였다는 점이 불편하게 와닿았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적대감이 사라지는 건 극적인 사건 하나가 아니라, 페퍼가 문을 두드리고, 거절당하고, 또 찾아가는 반복적인 행동 안에서 조용히 녹아내렸습니다.
이 영화에서 편견 극복 과정을 볼 때 주목해야 할 장면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페퍼가 처음 하시모토의 집을 찾아갔다가 거절당하고도 다시 찾아가는 장면
- 두 사람이 마을 중심가에 함께 나타났을 때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지는 장면
- 페퍼가 아끼던 만화책을 하시모토에게 선물하는 장면
이 세 장면이 이어지면서 두 사람의 관계가 조금씩 실질적으로 변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방식은, 제가 생각하기에 이 영화에서 가장 잘 만든 부분입니다.
전쟁 영화가 말하지 않은 것들
이 영화를 '전쟁 영화'로 분류하면 오히려 본질을 놓칠 수 있습니다. 장르적으로는 드라마 혹은 휴먼 드라마(human drama)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휴먼 드라마란 사회적 사건이나 역사적 배경보다 개인의 감정과 관계, 성장에 초점을 맞추는 장르를 의미합니다. 리틀 보이는 전쟁이라는 배경을 빌렸지만 그 안에서 다루고자 한 건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였습니다.
다만 제가 이 영화에서 아쉽다고 느낀 부분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기적 장면, 특히 지진 시퀀스와 아버지 생존이라는 결말은 카타르시스(catharsis)를 겨냥한 장치로 보입니다. 카타르시스란 관객이 극적 감정의 절정을 경험하며 억눌린 감정을 한꺼번에 해소하는 심리적 효과를 말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지점에서 감정적 몰입보다 오히려 살짝 거리가 생기는 걸 느꼈는데요. 개연성보다 감정적 설득에 너무 많이 기댄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일본계 미국인에 대한 차별이라는 사회 구조적 문제를 다루면서도, 하시모토라는 개인의 선함으로 이야기가 해소되는 방식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실제로 당시 강제 수용 피해자들에 대한 미국 정부의 공식 사과와 배상은 1988년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고, 피해자 1인당 2만 달러의 보상금이 지급되었습니다(출처: 미국 시민자유연맹(ACLU)). 영화 속 하시모토의 이야기는 감동적이지만, 그 뒤에 있는 역사적 무게를 생각하면 단순한 화해로 마무리되는 게 조금 가볍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선명합니다. 두려움을 마주하고 행동하는 것이 기적의 시작이라는 것. 페퍼가 산을 움직이려 했던 건 초자연적인 힘을 믿어서가 아니라, 아빠를 향한 마음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리틀 보이는 완벽한 영화가 아닙니다. 하지만 기대치를 조정하고 보면, 그 따뜻한 메시지가 꽤 오래 마음에 남는 작품입니다. 혹시 요즘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는데 믿음이 흔들리는 분이 있다면, 이 영화를 한 번 보시길 권합니다. 여덟 살 페퍼가 손에 쥔 부츠 하나가, 생각보다 많은 걸 말해줄 겁니다.